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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ervable Universe and Unobservable Universe (관측 가능한 우주와 관측 가능하지 않은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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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원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원은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우주의 경계이다. 그림 Ethan Segal. 인터넷 캡쳐) Observable Universe 란 말 그대로 지구를 중심으로 인간이 볼 수 있는 우주를 말한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우주의 끝이 거리로 따지면 460억 광년이라고 하니, 빛의 속도로 460억년을 가야 도달 할 수 있는 먼 거리이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저 너머에 또 우주가 전개 되어 있을 것이므로 보이지 않는 우주 저너머에는 무었이 있는지 도무지 끝이 있기나 하는 것인지 궁금하긴 하나 해답은 각자의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다. Observable Universe 안에는 2021년에 내린 계산에 의하면 Galaxy가 4조개가 들어 있다고 한다. Galaxy 라 함은 여러 항성과 성단 성운들이 모여 있는 커다란 집단을 말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있는 태양계는 Milky Way Galaxy (은하수) 의 변방에 위치한다고 한다.      (몽고의 고비사막에서 본 Milky Way Galaxy. AMR photography.인터넷 캡쳐) 어려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늘 나라는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던 생각이 난다. 방대한 우주의 크기와 시간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고 평생 분주하게 뛰며 애를 써도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매우 제한적이다. 사람은 죽어서 한줌의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거나 먼지가 되어 우주로 흩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우연히 지구 한구석에 던져져 무의미하게 불확정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진동하는 원자의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경험에 입각하여 인간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얕은 지각의 한계안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육신이 죽은뒤 부활하여 영생을 얻어 천국으로 간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시련과 고통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는 마음으로 덕담으로 하신 말씀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

퇴계 이황(1501 음력 11월 25일 - 1570 음력 12월 8일) 과 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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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 서당, 조선고적도보 1931, 인터넷 갭쳐)  사람이 살면서 제자들을 교육을 시키는데 얼마나 큰 공간이 필요할까? 공간을 크게 나누어 잠자는 방, 공부 방, 부엌등 3칸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도산서당이 잘 보여준다. 단촐한 3칸집이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울려 있는 곳에 세워졌다면 더 할 수 없이 좋을 것이다.  퇴계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여러차례 관직을 맡고 물러서기를 반복하면서 현실 정치의 참혹한 모습을 목도하며,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서당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내어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 을 만드는 것을 평생 꿈꿨다. 50여세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이곳 저곳에 서당을 지으며 옮기기를 여러 차례하다가 57세에 현재의 도산서당이 자리한 곳을 발견하고 4년에 걸쳐 3칸짜리 집을 마련한다. 도산 서당을 짓고 나서 평생의 원을 이루었다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이후에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잠시 잠시 관직을 받아 국가에 봉사를 하는 가운데도 꾸준히 학문에 정진을 하며 제자들을 양성한다. 퇴계의 기라성 같은 수 많은 제자 가운데 류성룡은 훗날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임명하고 끝까지 이순신을 조정의 간신 무리의 음해로 부터 지키고 보호하여 임진왜란을 이겨내는데 공헌을 한다.                                     (그림 김동욱저 퇴계의 건축관과 도산서당에서 따옴) 퇴계는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가이다. 퇴계의 위대함은 그의 학문적인 업적과 더불어 일상의 삶속에서 출신이나 성별의 차별을 넘어 모든 생명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실천한 삶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난다. 퇴계는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하였고 몸소 실천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퇴계의 손자며느리가 젖이 부족해 시골집에서 아기를 막 출산한 집안의 여종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지만, "남의 자식을 죽여 내 자식을 살리는 것은 불가하다" 며 거

아름다운 사람 김영옥 (1919.1.29 - 200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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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이 권한 책을 접하기 전까지 김영옥대령이란 사람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미국에서 20년이 넘게 살면서 사람을 직업이나 직위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인간됨과 행실에 비추어 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영웅이라면 이순신 장군이외에는 얼뜻 떠오르지 않으니, 어쩌다가 영웅 칭호를 듣게 되었는가 궁금해 졌다.  김영옥의 부친인 김순권은 1910년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시작으로 로스엔젤리스에 자리를 잡은 사업가이자 이승만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독립 운동가이다. 어머니 노라 고는 1916년 신학 공부를 하려고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오게 되었는데 김순권과 결혼을 하면서 공부를 접고 호두 껍질을 벗기는 노동을 시작으로 생업에 종사를 하면서 김영옥을 포함하여 6명의 자식을 낳아 기른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심한 시기에 태어난 김영옥은 애국심이 투철한 부친과 신앙심 두터운 모친의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는100%한국인이고 100% 미국인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당시 인종 차별이 극심한 미국 사회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젊은 김영옥은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어렵게 사병으로 자원 입대를 하였으나 군사 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받을 기회를 얻어 장교가 되어 하와이에 일본인 이민자로 구성된 100대대를 지휘하는 부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한다. 상급 지휘관이 김영옥에게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가 나쁠 것이니 다른 부대로 전출을 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우리는 미국인이며, 우리는 미국을 위해 함께 싸운다" 라며 제안을 거절한다. 일본인 이민자로 구성된 100대대의 부대원들은 처음에는 김영옥의 말을 안듣고 놀리고 조롱을 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프랑스 전투에 파병이 되어 함께 목숨을 건 전쟁을 치루면서 부대원들로 부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군인"이란 칭호를 받는다. 당시 많은 군인들이 김용옥의 부대원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김영옥은 치밀하게 조사하고

아름다운 사람, 이태석 신부 (1962.10.7 - 20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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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석 신부. 사진 인터넷 켑쳐) 사람은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 모짜르트가 되기도 하고 히틀러와 같은 괴물이 되기도 한다. 이태석 신부는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운 홀 어머님 밑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경속에서 자라면서 의사가 되기를 꿈 꾸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에는 또 신부가 되기를 꿈꾼다. 의사가 된 뒤에 신부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다.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의사와 신부 수련을 마치고, 하고 많은 가운데 아프리카로 가서 활동하기로 결정한다. 쉽지 않아 보이는 결정들을 주저없이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꿈을 꾸는 사람은 있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병든 사람이나 목자를 구하는 영혼들은 세상 어디에나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구지 아프리카에 가서 의사나 신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었일까? "신부 수업중 아프리카 남수단의 톤즈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제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라고 대답한다. 어떤 위대한 행위도 동기는 아주 소박한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는 인구 비례로 의료진의 비율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아 간단한 진단과 치료만 하더라도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 죽어가고 있다. 그런면에서 이태석신부가 아프리카를 선택한 것은 아름다운 결정이자 진실을 외면하지 않은 용기있는 결정이기도 하다. 이태석 신부가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하자 멀리서 2-3일 동안 걸어서 와서 진료를 받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는 세상에서 받은 것이라곤 멸시와 아픔밖에 없는 한센인에게 찾아갈 때는 뭐라도 작은 선물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가 한센병환자의 발에 맞게 직접 고안하여 만든 신발. 사진 인터넷 켑쳐) 이태석 신부는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브라스 밴드를 결성하여 아이들에게 직접 악기를 가르친다. 작은 몸 하나를 조금도 아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나는 2022년 대통령 후보 최재형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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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형 전 고등법원 판사, 전 사법연수원장, 전 가정 법원장, 전 감사원장, 1956,9.2 - ) 세상에는 맑고 따듯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다. 독일의 메르켈 수상이 그렇고 대한민국의 최재형이 그렇다. 국가나 민족의 명운은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대한민국과 한반도는 구한말 이래로 아주 중요한 위기의 순간에 서있다.  올바른 지도자의 선택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서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하는 가운데 나타난 분배의 불균형과 같은 여러 문제가 누적되어 국민간의 분열이 그 어느때 보다도 극심한 가운데 있다.   현재 정권을 잡은 이들은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민심을 분열시키고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권력을 유지하는데 급급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어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있다. 온 국민은 위기의 순간에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맑고 깨끗한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 잡고  선진화된 국가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책임있는 경영을 위임 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 남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국민들은 이제 더 흘릴 눈물도 없고 이제 까지 피땀흘려 쌓아 온 모든것을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대통령은 임기를 가진 고위직 공무원이다. 군주 국가의 왕이 아니다." 전직 현직 대통령의 계속되는 실패는 대통령직을 무소불위의 자리로 착각을 하고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고 권력을 남용하는데에서 부터 기인한다. 나는 최재형을 지지한다.  내가 최재형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와 그의 가족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잘 알려진데로 두명의 아이를 입양하여 키웠고 또 소아마비 친구를 고등학교 재학중에 3년간 매일 업고 등하교를 하였

Harlem Public Library 과다한 경쟁적 교육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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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11 West 124 th  Street, the Harlem Branch of the New York Public Library) Thomas Sowell (1930-  )은 Stanford 대학 Hoover Institute의 경제학자이다.  Sowell은 North Carolina의 흑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태어나자 마자 친적에게 입양이 되어 살다가 1930년대 당시 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주하는 흑인 이주 바람을 타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Thomas 집안에는 공부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주위에 살던 Eddi Mapp이란 사람을 알게 되고, Eddi는 9살의 Thomas를 Harlem에 있는 Public Library에 데려가 책을 찾고 빌리는 법 등을 가르쳐 준다. 당시 Harlem Public Library에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책과 미국 사회의 계층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갈 수 있는 방법을 담은 책이 있었지만, Harlem지역에 사는 흑인 중 도서관을 활용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유독 유대인들만이 도서관의 혜택을 보았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Public Libarary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자신의 모습은 찾아 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또 당시 Harlem의 공교육의 수준은 지금보다 월등히 좋았다고 한다. 현재의 도심 빈민 지역의 공 교육은 80년전의 Harlem만도 못하다고 하며 "이렇게 형편없는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로 부터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고 한탄을 한다. Sowell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다가 한국전에 사진병으로 참전을 한다. 의무 기간을 마치고 돌아와  워싱턴에서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 Howard College에서 공부하던 중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여 교수들의 추천으로 하바드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고 이후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여 학문의 길에 들어선다. S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Margaret Thatcher (1925.10.12 - 2013.4.8), British Prime Minister (1979-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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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garet Thatcher, 사진 Getty Image/인터넷 켑쳐) Margaret Thatcher (마가렛 대처)는 지도자의 신념과 자질이 국가의 흥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가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대처는 신분 사회이자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작은 식료품점을 하는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친으로 부터 열심히 일해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하고 또 옳다고 믿는 가치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난관이나 비난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신 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장차 영국을 뒤 흔들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가정에서 부터 양성하게 된다. Oxford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지만 보수당 청년위원회 활동을 하였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24세의 나이로 비록 낙선을 하였지만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를 하여 일찌감치 정치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의회선거에서 낙선을 거듭하는가운데 결혼을 하고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959년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성한다. 그후 내각과 정치인을 오가며 미래를 준비 하게 된다. 교육부 장관 재임시에는 정부 재정 긴축을 위해 7-11사이의 아동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던 우유 급식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려 언론으로 부터 "우유 도둑"이란 명칭을 얻게 되고 동시에 "영국에서 가장 인기없는 여성"이란 비야낭을 듣기도 한다. 대처는 남성 중심적인 정치판에서 1970년대 초 "여자가 영국에서 수상이 되는 일은 내 생애에 절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지만 1975년 보수당 당수가 되고 1979년 영국수상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수상으로 취임할 당시 영 국의 최대 현안은 추락하는 경제였다.  영국경제의 어두운 그림자로 어떤 정치인도 손을 대기 싫어 하는 막강하고 오만한 탄광 노조와 한판 승부를 벌여 노조를 와해 시키고  국민의 세금만 축내면서 경쟁력을 키우지 않고 방만한 경영을 하던  공기업을 차례로 민영화

Claude Levi-Strauss (1908.11.28 - 2009.10.30), "슬픈 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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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Praemium Erasmianum Foundation 홈페이지) Claude Levi-Strauss 는 지구가 둥글다라고 말한 Copernicus에 비견되는 인류학자이다. Levi-Strauss 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법과 철학을 공부하고 Secondary education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35년 프랑스 정부에서 공모한 문화 사절단에 막차로 지원하여 방문 교수 자격으로 브라질 Sao Paulo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친다. 브라질에 체류하는 4년의 기간동안 사절단의 일원이자 인류학 교수인 부인과 함께 아마존 원주민이 사는 지역을 방문하며 연구를 진행한다. 실제 아마존 원주민과 함께 산 기간은 몇 날에 불과하였지만 지속적인 탐방 연구를 통해 지식을 축적한다. 여행중 부인이 눈병을 얻어 연구 수행이 어려워지자 인류학적 연구의 사명을 떠안게 된다. 전문적인 고등 교육을 받은 유럽인이 아마존 원주민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며 연구한 학자는 이전에 없었다고 한다. Levi-Strauss 는 인류학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정식으로 인류학 교육을 받은 부인으로 부터 간접 교육을 받아 오히려 인류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도그마에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브라질에서의 4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 소르본 대학에서 잠시 근무를 하던 중 1941나치와 불란서의 비시정부의 (Vichy France) 유태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한다.  미국은 1930-40년대에 걸쳐 유럽의 박해 받는 지식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특히 뉴욕은 구대륙과 신대륙의 다양한 분야의 지성의 만남이라는 실험장이 마련된다. 뉴욕에 자리를 잡은 Levi-Strauss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Roman Jacobson이란 언어학자를 만나 Structural Languages에 대해 배우고 그밖에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통해 인류학에 구조주의 기법을 도입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8년 다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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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War Memorial, Westborough, MA) 모든 정치적인 결정의 마지막에는 결국 무고한 일반 시민이 그 대가를 몸으로 지불하게 되어 있다. 국가의 운영을 위임 맡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결정을 내리지만, 값은 일반 시민이 치룬다. 작은 결정들이 쌓여 거지 국가로 전락하기도 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도 한다. 그 결정이 자의든 타의든 전쟁인 경우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게 국가가 국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추모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대한 고마움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죽은 병사들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랄뿐일 것이다.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많은 도시에 1차대전, 2차대전, 한국전쟁에 참전을 하였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보게 된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추모하고 대접하는 가를 보면 그 나라의 미래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쓰다가 목숨을 잃은 순국 선열들을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으로 추모를 하고 있는가?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은 수 많은 미국인을 포함한 우방의 친구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추모 하고 있는가? 현재 우리의 삶과 경제적인 번영이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의 덕택이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하는 가운데 나타난 분배의 불균형과 같은 여러 폐해로 국민이 분열이 되어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지도자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가는 경제가 파탄이 나서 거지가 되어 온 국민이 길거리에 나가 앉거나 심한 경우 나라를 잃고 나서 노예 생활을 할 때 알게 될 것이다. 역사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 남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열린 사회의 적들 John Dewey (1859-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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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인터넷 켑쳐) 현재 미국 공교육에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지만 지난 한세기 미국이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근원에 공교육 저변에 깔린 정신과 철학이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런면에서 미국 교육의 근간을 세운 교육 철학 사상가인  John Dewey 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학교 교육의 목적을 "인생이란 긴 과정속에서 계속 변화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학습하는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 이라고 하였다. 한국에서의 학교의 교육 목표는 어떠한가? 한국의 학부모들의 입을 빌리면 입시위주의 교육이 전부이며 학교에서는 이름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의 숫자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한다. 정규 교육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학생들은 방과후 사교육을 통하여 암기 위주의 입시 준비로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경제 부흥을 이루었다. 온 국민이 더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걸고 학생들은 부모의 지시에 순종하며 잘하든 못하든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교육이 급격한 경제 성장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녀들의 교육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미국의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명문 대학의 입학은 고교 시절 학업 성적이 우수 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졸업은 사회에 더 많은 공헌을 하기 위한 준비를 잘 받았을 것이다라는 가정이 있을 뿐이다. 미국은 대학 졸업장만으로 평생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가 아니다. 하바드대를 나와도 졸업장은 평생 자기 집 벽에 걸어 놓을 수 있지만 약발은 3년 밖에는 안간다. 3년이 지난 후에는 졸업 후 3년간의 업적을  보여주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청소년 시절에는 평범했으나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