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김영옥 (1919.1.29 - 2005.12.29)
집사람이 권한 책을 접하기 전까지 김영옥대령이란 사람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미국에서 20년이 넘게 살면서 사람을 직업이나 직위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인간됨과 행실에 비추어 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영웅이라면 이순신 장군이외에는 얼뜻 떠오르지 않으니, 어쩌다가 영웅 칭호를 듣게 되었는가 궁금해 졌다.
김영옥의 부친인 김순권은 1910년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시작으로 로스엔젤리스에 자리를 잡은 사업가이자 이승만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독립 운동가이다. 어머니 노라 고는 1916년 신학 공부를 하려고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오게 되었는데 김순권과 결혼을 하면서 공부를 접고 호두 껍질을 벗기는 노동을 시작으로 생업에 종사를 하면서 김영옥을 포함하여 6명의 자식을 낳아 기른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심한 시기에 태어난 김영옥은 애국심이 투철한 부친과 신앙심 두터운 모친의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는100%한국인이고 100% 미국인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당시 인종 차별이 극심한 미국 사회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젊은 김영옥은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어렵게 사병으로 자원 입대를 하였으나 군사 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받을 기회를 얻어 장교가 되어 하와이에 일본인 이민자로 구성된 100대대를 지휘하는 부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한다. 상급 지휘관이 김영옥에게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가 나쁠 것이니 다른 부대로 전출을 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우리는 미국인이며, 우리는 미국을 위해 함께 싸운다" 라며 제안을 거절한다.
일본인 이민자로 구성된 100대대의 부대원들은 처음에는 김영옥의 말을 안듣고 놀리고 조롱을 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프랑스 전투에 파병이 되어 함께 목숨을 건 전쟁을 치루면서 부대원들로 부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군인"이란 칭호를 받는다. 당시 많은 군인들이 김용옥의 부대원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김영옥은 치밀하게 조사하고 연구를 하여 전투를 시작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부대원들의 피해가 최소가 되도록 전략을 짰다. 간혹 승패나 생사를 예측 하기 어려운 위험한 임무는 부하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나섰다고 한다. "그는 항상 최전선에 있었고 선봉에 있었다.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가 없다" 부대원의 말이다. 그는 생각하는 지혜로운 지휘관이었고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인도주의자였다.
하와이에 아직 살아남은 100부대 소속의 90이 훨씬 넘은 노병들은 김영옥을 " 멋진 군인이었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 깊이 존경한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총탄이 빗발치게 솟아지는 전쟁속에서 태연하게 여기 저기를 다니며 정탐을 하고 부대원을 격려하였다고 회고 한다.
김영옥은 난생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전투를 경험하면서 "여기가 바로 내가 있어야 자리"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 갈 수 있게 된다면 남은 인생을 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을 하며 살겠다" 고 결심한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거짓말 처럼 사라졌다" 고 한다. 전쟁 영웅으로서의 김영옥의 장정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김영옥은 미군으로 부터 받은 여러차례의 훈장이외에, 이탈리아 최고 십자 무공 훈장,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레지오 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총탄을 무서워 하지 않았던 김영옥도 전쟁중 두번의 큰 부상을 당한다. 첫번째는 프랑스 비퐁텐느지역을 해방시키는 전투에서 독일군의 포격을 받아 쓰려졌지만 의료진의 헌신적인 치료로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진다.
(1945년 2월 유럽 전선에서 돌아온 김영옥과 어머니. LA Times. 인터넷 캡쳐)
2차대전후 퇴역을 하고 사업을 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모의 나라를 구하겠다" 며 예비역 대위로 자원 입대를 한다. 현재의 3.8선이 강원도 쪽이 북쪽으로 60 km 더 높게 올라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부대의 일원으로 활약을 하였다.
두번째 부상은 한국전 참전중 아군의 오폭으로 인한 것이었다. 김영옥이 지휘하는 부대가 북쪽으로 너무 높이 올라가 있어 중공군으로 오인을 하여 폭격을 하였다는 것이다.
김영옥은 "전쟁이 비극인 이유는 병사들이 적군의 총탄과 포격에 의해서만 아니고 아군의 오폭, 오격으로 부지기수가 목숨을 잃고 부상을 입는다"는데 있다고 한다.
김영옥은 같이 전투에 참여한 상관이나 부하들로 부터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내 휘하에 있던 50만 군인중에 최고의 군인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
6.25전쟁에 참전후 1972년 53세의 나이로 군에서 예편을 하고 32년간 로스엘젤리스 지역에 여러 자원 봉사 단체를 통해 고아, 난민, 이민자, 가정 폭력의 희생자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옹호와 신장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
그의 인생의 전반부는 군인으로 시작하였지만 후반에는 국경을 초월한 인도주의자로서 봉사의 삶을 살았다. 이탈리아 전투에서 자신에게 한 맹세를 지킨 삶을 산 것이다.
김영옥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김영옥은 위대한 사람이다. 그가 진정한 영웅이란 칭송에 참으로 걸맞는 이유는 영웅이란 칭호를 훗날 역사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함께 전쟁을 치룬 병사, 동료, 상급 지휘관들로 부터 받은 가슴으로 부터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애국자인 아버지, 신앙심이 많은 어머니, 김영옥에게 기회를 제공한 미국, 그리고 김영옥과 함께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모든 참전 용사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김영옥장군은 멋진 인생의 영웅입니다.
ReplyDelete이기적으로 눈앞의 삶에 얽매어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영웅 김영옥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치셨군요. 감동의 여운이 오래가는 글 감사합니다.
ReplyDelete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닌 많은 분들의 희생이 바탕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감격스럽습니다
ReplyDelete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과 저를 되 돌아보는 기회였습니다
ReplyDelete잘 읽었습니다
ReplyDelete격동기를 살았던 우리 선대 분들의 개인사가 바로 우리의 현대사이기도 합니다.
ReplyDelete세상에는 참으로 용기있고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데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희생 할 용기도 내보지 못한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ReplyDelete오늘이 이런분들의 헌신을 통해 물려받은 것임을 새삼 생각하고 무슨 발자국을 낭겨야할찌 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 감사~
ReplyDelete오래 전에 한국 신문에서 훌륭한 한국계 미군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ReplyDelete군인 얘기라 별로 관심이 없어서 제목만 읽고 넘긴 적이 있습니다.
김교수님의 글을 읽고 예전에 신문에 났던 그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google 서치를 해보니 같은 분이셔서, 관심을 갖고 몇번 읽어보았습니디.
일생을 미국과 한국, 그리고 동양 이민자들을 위해 헌신하신 삶이 진짜 감동입니다.
그리고 김교수님께서 소개를 안 하셨다면,
별로 관심을 안 주고 모르고 지나갔을 영웅들에 대해 소개를 해주시면서,
그분들의 훌륭한 정신을 다시 한번 우리 마음에 새기고,
우리들의 삶에 대한 바른 자세가 되도록 메신저 역활을 하시는 김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ReplyDelete한국 안에서만 살다보니, 한국 밖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줄게 되는데, 이러한 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헌신하였는지 알 수 있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