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박사 (1864.1.7 - 1951.1.5)
독립운동가, 사상가, 언론인, 의사.
서재필박사는 18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를 하고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이 되어 일본에서 1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정부의 관료로 경력을 시작한다. 1884년 12월4일 갑신정변에 가담하였으나 3일만에 정변에 실패하여 정변에 참여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참살을 당하게 되고 하루 아침에 역모자의 신분이 되어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 Sanfrancisco에 도착하여 21살의 나이에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같이 망명을 왔던 박영효, 서광범은 혹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 갔고, 서재필 혼자 남아 낮에는 막노동을 하며 야간에는 기독청년회에서 YMCA 영어 공부를 하였다. 1년이 지나 John Hollebeck 이라는 독지가의 도움으로 1886년 6월 Philadelphia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인 Harry Hillman Academy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1888년에는 George Washington대학의 전신인 Columbian대학의 예과를 거쳐 1889년 9월 정식으로 의과대학 야간부에 입학을 하게 되고 1892년 28세의 나이로 의과 대학을 졸업하여 한국 사람 최초로 미국 의학사 학위를 받아 의사가 된다. 망명 11년만인 1895년 일시 귀국을 하여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아 일을 하기도 하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1898년 다시 도미를 하였고, 이후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을 하고 미국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독립운동에 몰두 하느라 잠시 사업을 등한히 한 탓으로 60이 다된 나이에 사업의 완전한 실패를 겪게 되고 사업으로 재기할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 고전을 하던중 1926년 20여년간 떠나 있었던 의사의 일을 다시 하기 위해 63세의 나이에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3년간 의학보수 재교육을 받고 의사의 길로 다시 들어서 남은 생은 의사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는다.
서재필은 출중한 지력과, 인격, 성실성, 애국심이 있었지만 세상의 커다란 변혁기에 태어나서 관료로 시작하여 혁명가, 망명객, 막노동군, 20대의 고등학생, 의사, 사업가, 독립운동가, 정부관료, 언론인등을 오가며 파란 만장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평생을 거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단 한번도 버린적이 없었다. 조선과 미국을 오가며 여러 신분과 직업을 거쳤고 다양한 일에 종사를 하였으나 그의 마음에는 시종일관 조선인이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 체제하에서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뿐이었다.
여기 그의 어록을 나눈다.
"조선이 삼대 (중국, 일본, 러시아) 국민의 중간에 처하였으나 만일 그 자녀들이 그들의 지리적 자연적 능력을 잘 사용을 하면 동양의 평화와 문화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아일보 19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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