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1501 음력 11월 25일 - 1570 음력 12월 8일) 과 도산서당
(도산 서당, 조선고적도보 1931, 인터넷 갭쳐) 사람이 살면서 제자들을 교육을 시키는데 얼마나 큰 공간이 필요할까? 공간을 크게 나누어 잠자는 방, 공부 방, 부엌등 3칸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도산서당이 잘 보여준다. 단촐한 3칸집이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울려 있는 곳에 세워졌다면 더 할 수 없이 좋을 것이다. 퇴계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여러차례 관직을 맡고 물러서기를 반복하면서 현실 정치의 참혹한 모습을 목도하며,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서당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내어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 을 만드는 것을 평생 꿈꿨다. 50여세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이곳 저곳에 서당을 지으며 옮기기를 여러 차례하다가 57세에 현재의 도산서당이 자리한 곳을 발견하고 4년에 걸쳐 3칸짜리 집을 마련한다. 도산 서당을 짓고 나서 평생의 원을 이루었다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이후에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잠시 잠시 관직을 받아 국가에 봉사를 하는 가운데도 꾸준히 학문에 정진을 하며 제자들을 양성한다. 퇴계의 기라성 같은 수 많은 제자 가운데 류성룡은 훗날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임명하고 끝까지 이순신을 조정의 간신 무리의 음해로 부터 지키고 보호하여 임진왜란을 이겨내는데 공헌을 한다. (그림 김동욱저 퇴계의 건축관과 도산서당에서 따옴) 퇴계는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가이다. 퇴계의 위대함은 그의 학문적인 업적과 더불어 일상의 삶속에서 출신이나 성별의 차별을 넘어 모든 생명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실천한 삶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난다. 퇴계는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하였고 몸소 실천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퇴계의 손자며느리가 젖이 부족해 시골집에서 아기를 막 출산한 집안의 여종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지만, "남의 자식을 죽여 내 자식을 살리는 것은 불가하다" 며 거